[이 책은]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 시대의 사람들은 여호와로부터 완전히 돌아서지도 않았고, 온전히 순종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진실로 반쪽짜리 제자들이이었다. 우리 시대의 특징은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와 같은 사사기 시대와 다를 바 없다.
우상을 정복하기보다, 그들 가운데 살기로 선택한 백성들
하나님의 백성이 가나안을 온전히 정복하지 못한 채, 그들과 뒤섞여 살고 있었다. 우상들 가운데 살았던 그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주님으로 바라볼지, 아니면 그 시대의 바알들을 따를지를 매일 선택해야 했다. 사사기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 사람들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며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데 실패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래도 구원하시는 그분의 자비를 보라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사기의 핵심은 자비로우시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항상 반역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항상 끊임없이 일하신 놀라운 구원의 이야기다. 궁극적으로 사사기의 영웅은 단 한 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구원 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들을 구원하셨다. 사사기는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는 한, 사사기는 우리의 필독서이다.
사사기를 통해 우리에게 반쪽짜리 순종의 참담한 결과와 비참함을 똑똑히 알게 하며, 끊임없는 반역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참으시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게 되며, 내 마음대로의 신앙에서 벗어나게 자신을 돌아보게 할 것이다.
책속으로 추가
::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여호수아서의 렌즈를 통해 볼 때, 우리는 사사기 1장에서 절반의 제자도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사기 1장만 떼어 놓고 보면, 왜 이스라엘 백성이 정복에 성공하지 못했는지에 대해 군사력의 열세, 합리적인 타협, 경제적 편의성 등 타당한 이유들이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이스라엘에는 철 병거가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가나안의 철 병거를 몰아내겠는가?(1:19)
1장을 그들이 말하는 대로 들어보면, 이스라엘이 그들의 정복 상황에 대해 기자회견이라도 하는 것 같다. 그들은 왜 하나님과 우리가 기대한 것처럼 성공적으로 정복하지 못했는지 ‘둘러대고’ 있다.
그들은 독자들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공감하도록 달랜다. 그래서 그들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다는”(19절) 것을 듣다 보면, 우리도 슬그머니 동의하게 된다.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만다.
그러다 하나님의 평가를 보고 충격을 받는다. 1장에서 그 사실을 보여 줬다. 이제 하늘의 설명을 듣는다.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말하되”(2:1). 왜 천사는 “길갈에서부터 … 올라와” 말했을까? 길갈은 요단강 서쪽의 마을이며, 여리고성 가까이에 있다(삿 2:1). 여호와의 천사가 길갈에 사는 것은 아닐 텐데, 왜 여기서 길갈이 언급되었을까?
왜냐하면 여호수아서 5장을 보면, 길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고, 거기서 하나님이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수 5:9, ‘길갈’은 ‘구르다’를 의미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곳은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께 붙들어 매시고, 은혜로,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동기로 그들과 관계를 시작하신 곳이다.
그러므로 천사가 길갈에서 온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상기시켰다. 사사기 2장 1절에서 천사가 말했듯이, 여호와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한 하나님이심을 상기시켰다
:: 너희는 불순종했다
은혜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 성적을 통렬히 평가하셨다.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2절). 이스라엘은 어떻게 하나님께 불순종했는가? 이스라엘은 “언약을 맺지 말며”라는 말씀을 듣고도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들의 제단들을 허는 데”(2절) 실패했다. 이 작전의 목적이었는데도 말이다.
즉 이 군사작전은 인종 청소가 아니었다. 그래서 가나안의 창녀인 라합은 함께 살도록 허락되었던 것이다(수 2:17-20, 6:25). 그리고 겐 사람은 유다와 함께 정착했다(삿 1:16). 이 작전은 제국주의적 정복이 아니었다. 약탈하거나 노예를 삼는 것이 아무에게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 목적은 가나안을 우상으로부터 정결하게 해서,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언약에 충실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어떤 이유로든, 가나안 족속이 그 땅에 계속 살게 허락하거나, 그들과 언약으로 합의하면, 그 결과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였다.
여기서의 기본 가르침은 하나님은 우리 삶의 일부 영역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주권을 행사하길 원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 전체를 깨끗하게 하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하고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상들과 함께 살지 않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완전히 거절하지도 않았지만, 완전히 영접하지도 않았다. 그 절반의 제자도와 타협이 사사기 전체에서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불안정한 화합물로 묘사된다. 그 상태는 지속될 수 없다.
결국은 우리 삶 전부를 감사와 사랑의 순종으로 하나님께 드리든가, 아니면 전혀 드리지 않든가, 둘 중 하나다. 부분적 순종은, 우리가 앞으로 보겠지만, 전적인 불순종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 못하는 것인가, 안하는 것인가
사사기 1장 19절에 이스라엘 백성이 “못하였으며”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2장 2절은 그 주장과 정반대다. 요컨대, 이스라엘 백성은 “우리는 못했어요”라고 했고 하나님은 “너희는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게 하는 데 실패했다. 그 결과는 명백한 파국이었다. “그러므로” 너희가 언약을 깨뜨리고 불순종했으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3절사사기 2장에서, 사람들은 울고(4절) 제사를 드리는(5절) 반응을 보였다. 여호수아 후 첫 세대는 여호와로부터 완전히 돌아서지도 않았고, 여호와께 온전히 순종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진실로 반쪽짜리 마음의 제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은 가시와 올무에 둘러싸였고, 구조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순종을 타협하라는 끊임없는 유혹에 시달렸다.
이렇게 해서 사사기의 무대가 완성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숭배 문화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삶을 추구했지만 실패할 때가 더 많았다